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4군단 게미나 (문단 편집) ==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 == 기원전 5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벨가이]] 연합군에 맞서 진군하기 전에 [[13군단 게미나|13군단]]과 함께 창설되었다. [[사비스 전투]] 당시, 막 창설되었던 그들은 13군단과 함께 화물들을 경비하며 숙영지로 이동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던 중 선배 군단들이 네르비 족 등의 갑작스러운 공세로 인해 위기에 몰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즉시 전장으로 달려갔다. 네르비족이 [[7군단 클라우디아|7군단]]과 [[12군단 풀미나타|12군단]] 전열을 뚫고 자신들에게 몰려들자, 그들은 즉시 전투 대형을 결성해 무질서하게 몰려드는 적군을 물리쳤다. 그 후 카이사르로부터 어서 위기에 몰린 7군단과 12군단을 도우라는 메시지를 전달바독 즉시 달려와서 다른 군단들과 함께 네르비족을 섬멸했다. 이후에도 카이사르가 치른 여러 전투에서 참전해 승리에 기여하던 그들은 기원전 54년 11월 [[퀸투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아우룬쿨레이우스 코타]]의 지휘하에 다른 군단에서 차출한 5개 코호트와 함께 카르누테스 족의 영역에서 겨울 숙영하면서 이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암비오릭스의 난]]에 휘말려 전멸하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에서 이 패배의 원인이 오로지 암비오릭스의 책략에 속은 사비누스의 아둔함에 있다고 몰아세웠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애초에 로마에 적대적인 부족민들의 영역에 군대를 분산시켜 배치한 카이사르의 결정에 문제가 있었으며, 카이사르가 자신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 사비누스를 무능한 장군으로 매도했다고 본다. 실제로 독자적으로 노르망디 일대의 갈리아족을 평정했고,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 원정을 떠났을 때 반란을 일으킨 메나피족을 제압하기도 할 정도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편이었던 사비누스가 갈리아 전기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무능하고 겁많은 인물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카이사르는 암비오릭스의 난을 진압한 후 14군단을 재창설했다. 이들은 [[베르킨게토릭스]]를 중심으로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봉기한 갈리아 연합군에 선배 군단들과 함께 맞섰다. 특히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알레시아 성내와 포위망 외곽에서 동시에 협공해오는 갈리아인들을 상대로 굳건히 버텨서 카이사르의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 편에 섰고, 카이사르가 1차 히스파니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동행하여 [[일레르다 전투]]를 벌였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발칸 원정에도 따라가서 [[디라키움 공방전]]에 참여했고, 뒤이은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여해 승리에 기여했다. 그 후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카이사르가 토지를 분배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르느라 소식이 오랫동안 끊기자, [[7군단 클라우디아|7군단]], [[9군단 히스파나|9군단]], [[10군단 에퀴스트리스|10군단]], [[12군단 풀미나타|12군단]]이 이러다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로마를 지켰다. 그 후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동행한 뒤 해산되었다가 기원전 41년 이후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재창설되어 [[시칠리아 내전]]에 투입되었다. 기원전 32~30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잉 발발했을 때 옥타비아누스 편에 섰고,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따르는 군단병들을 격파했다. 이후 14군단 퇴역병들은 이탈리아의 아테스테에 정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